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녕 김씨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본관 김녕은 김해 지역이지만 [[가야]] 계통이 아닌 [[신라]] 계통 본관이다. 시조 김시흥(金時興)은 신라 [[경순왕]](敬順王)의 4남 김은열(金殷說)의 5대손인 동정(同正) 김봉기(金鳳麒)의 넷째 아들로, [[고려]] [[인종(고려)|인종]] 때 평장사(平章事)를 역임하고 [[묘청]]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(金寧君)에 봉해졌다. 여기에서 본관이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金時興.jpg|width=100%]]}}}|| 김녕은 현재의 [[김해시]] 지역으로[* 금관으로 불리다가 신라 통일 이후에 김해라는 이름을 얻었고 고려 때 잠시 김녕이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김해로 바뀐 뒤 오늘에 이른다.], 이 때문에 김녕의 지명이 김해로 바뀌자 졸지에 김해 김씨가 되어버린 김녕 김씨들은 많은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. 결국 [[김해 김씨]]가 선김(先金), 김녕 김씨가 후김(後金)으로 불리는 걸로 적당히 합의했다가, 김녕 김씨 쪽에서 본관을 그냥 옛 이름인 김녕으로 되돌리기로 조선 [[헌종(조선)|헌종]]~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 때에서야 결정되었다. 그 전에는 중간에 사성 김해 김씨까지 생기면서 헷갈리는 게 상당히 심해서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. 한편 일부 계통은 김녕 김씨로 갈아타지 않고, 그냥 김해 김씨[* 실제로 북한에서 본관을 '김해'로 쓰는 김씨 집성촌 대다수가 실제로는 '김녕' 김씨 계열이다. 이북 지역의 김씨들은 본관의 명칭을 되돌리지 않은 것. 예컨대 [[김홍일(군인)|김홍일]] 장군의 집안도 김녕으로 바꾸지 않고 김해 그대로 쓴다.]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. 이와 같이 같은 후김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분관된, 시조를 김인찬으로 하는 익화파(익화 김씨, 양근 김씨), 종남파, 법흥파(법흥 김씨)[* 다만, 법흥 김씨는 족보가 복잡하게 꼬인 상태이다. 법흥 김씨에서는 김은열의 아들인 김염을 시조로 두고, 김녕 김씨의 관조인 김시흥과 법흥 김씨의 시조인 김춘을 중시조로 본다.], 종민파와는 과거 통혼을 하지 않았으며, 동성동본 통혼 이후에도 가풍이 엄한 집안에서는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.[* 위의 파 모두 다 김녕 김씨로 바꾸지 않은 것은 아니고 집안에 따라 김해 김씨로 쓰는 집도 있고, 김녕 김씨로 쓰는 집안도 있다.] 이외에도 결성 김씨, 분성 김씨도 같은 계통이라 통혼하지 않았다. 조선 시대에는 크게 빛을 발하지는 못했는데, 이는 [[사육신]] 사건 때, [[김문기(조선)|김문기]]가 단종 절신으로 순절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나버렸다[* 실제로 김녕 김씨의 파조 중 대부분은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 인물들이다.]. 그렇게 단종 복위 운동 때 반역으로 죽은 사람들이 모두 신원되었다. 그런데 문제는 여기저기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이 [[김문기(조선)|김문기]]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났다고 한다. 이게 얼마나 심했으면 상기한 바와 같이 [[헌종(조선)|헌종]] ~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 때 본관을 김녕 김씨로 되돌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. 심지어 [[김문기(조선)|김문기]]의 후손도 김녕 김씨 충의공파(忠毅公派), [[경주 김씨]] 백촌공파(白村公派), [[김해 김씨]] 백촌공파(白村公派)로 갈라졌다.[* 심지어 [[전주 김씨]] 족보에 김문기라는 이름이 나온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